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가 요시히데 (문단 편집) == 여담 == * 2019년(헤이세이 31년) 4월 1일 신 연호 발표를 아베 총리가 할지, 아니면 전례처럼 관방장관이 할지 여러 말이 오가다가, 쇼와에서 헤이세이로 넘어갈 때 [[오부치 게이조]] 당시 관방장관이 발표한 전례를 따라 스가 관방장관이 발표한 뒤 아베 총리가 담화를 할 것을 3월 27일에 결정했고, 동년 4월 1일 11시 40분 레이와 시대 시작을 발표했다. 따라서 향후 스가 장관도 일명 [[헤이세이 시대|헤이세이]] 아저씨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오부치 총리처럼 '[[레이와 시대|레이와]] 아저씨'라는 내용이 조금씩 나왔다.[* 오부치와는 달리 은색 손목시계를 찼다.] 하지만 당시에는 연호를 생중계로 공개한다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어서 관심이 높기도 했고[* 쇼와의 선황은 다이쇼 덴노인데, 이 사람은 '''텔레비전이 발명되기도 이전'''인 1926년에 사망했다.] 신문 등 아날로그 매체의 영향력이 높았던 시대라서 신문 1면을 장식한 [[오부치 게이조]] 당시 관방장관이 일본 국민에게 몹시 강렬히 각인됐던 까닭이 크다. 이에 비해서 스가 장관은 최장 재임 장관으로 7년 넘게 각종 정부 발표를 해와서 별 감흥이 없다는 지적도 받았다. 일본 젊은이들한텐 '그냥 원래 발표하는 아저씨구나'[* 관방장관이라는 직무가 책임지는 일을 보면 크게 이상하진 않다.] 라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치적 관심이 낮은 일본 젊은층에는 "레이와 아저씨(令和おじさん)"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그런데 그 레이와 아저씨'''가 [[나루히토]] 명의의 첫 내각총리대신 임명장[* 본인이 공표한 [[레이와 시대|레이와]] 연호가 적힌 최초의 총리대신 임명장이기도 하다.]을 받는 인물[* [[아베 신조]]는 [[아키히토]] 덴노의 총리대신 임명장을 받고 [[레이와 시대]]까지 유임한 총리이므로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즉 '''레이와 시대에 취임하는 첫 총리'''가 되는 상당히 묘한 상황이 되었다.[* 헤이세이 아저씨로 유명세를 치른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연임 반영 없이 머릿수로) 헤이세이 시대의 9번째 총리가 된 사례도 실제로 있다. 쇼와 시대에 취임하여 헤이세이 시대까지 유임한, 즉 본인이 헤이세이 연호를 발표할 당시의 총리였던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를 포함한 값이다. 다만 전술했듯 다케시타 총리가 취임할 당시는 아키히토 황태자의 대리청정 체제였던 탓에 황태자가 대리 서명하고 국새도 대신 찍었다. 그래서 다케시타 총리의 임명장에 있는 쇼와 덴노의 서명 필체는 황태자의 것이며 그 옆에 황태자의 서명도 병기되어 있다. 고로 실질적으로는 다케시타 총리도 아키히토에게 인준을 받은 셈이다. 정식으로 [[아키히토]] 명의의 첫 총리 임명장을 받은 사람은 [[우노 소스케]].] [[파일:레이와 아저씨.jpg|width=400]] * 성씨는 [[간 나오토]] 전 총리대신과 완전히 똑같은 '菅'자를 쓴다. 다만 스가 총리의 경우에는 이 글자를 '''스가'''라고 읽고, 간 전 총리의 경우에는 '''간'''으로 읽는다. 스가가 아베 총리의 후임으로 유력해지자, 스가가 총리로 퇴임하면 양쪽 모두 菅元首相(스가/간 전 수상)이 되기 때문에 신문에서 [[후리가나]]를 붙여야 한다는 소소한 문제가 거론되기도 했다. 그리고 스가가 2020년 9월에 실제 총리가 되고, 1년 뒤 물러나면서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현실이 되었다]]. * 역대 최장 재임 [[관방장관]]이다. 종래 1289일간 관방장관을 지낸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가 최장 재임 관방장관이었지만, 2016년 7월 7일 스가 장관이 이 기록을 경신했다. * 정치 생활을 오래도록 하였음에도 자신만의 파벌을 만들지 않은, 관료형 정치인을 고수했다. 성격이 진중하고 침착할 뿐만 아니라 술, 담배나 유흥 따위도 일절 하지 않으며,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관방장관 자리에까지 오른 나름 [[입지전적]]스런 인물로 [[일본/정치|일본 정계]]에서 평판이 좋은 편이다. 이런 처신 덕에 일본 언론에서 비판을 잘 받지 않는 드문 정치인이다. 그런데 주간문춘은 스가 장관이 집안과 학력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는 [[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1871689?sid=104|기사를 내보냈다.]] 실제로는 은수저 정도는 되는 집안과 학맥이지만 중앙정계에서 인정받기 위해 축소신고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집안이 딸기 농사를 하였지만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이후 신품종개발을 통해 어느정도 재산을 축적하였지만 그렇게 큰 돈은 벌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스가는 대학 입학 전 막노동, 건물 경비 등을 하며 학비를 벌어 대학에 들어갔다.] 다만 쟁쟁한 화족 출신에 아버지를 넘어 할아버지 세대[* [[아베 신조]]와 [[고노 다로]]가 할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받은 대표적 정치가다.]에서부터 세습정치를 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증조할아버지([[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의 케이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가 있는 일본에서, 스가 총리는 일반 국민 시선에서는 어느 정도 집안이 된다고 해도 자민당 간사장, 내각 장관 이상급을 노리는 중앙 정치인으로써는 혈통 요구 허들이 어마어마하게 높기 때문에 일본 정치권 내에선 흙수저 취급 받기엔 모자람이 없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 한일 문제에선 관련된 논평 등을 보면 강경 노선을 유지한다. 2014년엔 중국 [[하얼빈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개관되자 "[[안중근]]은 일본 제국의 [[이토 히로부미|초대 내각총리대신]]을 살해하여 사형 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며 [[https://www.yna.co.kr/view/AKR20140120112500073|항의를 한 바 있으며,]] 강제징용 문제에서도 한국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스가의 대외관은 평이 좀 갈리는 편이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스가가 아베의 후임으로 거론되는 후보군 중에선 제일 별로인 것 같다며 우려를 표한 반면, [[호사카 유지]] 교수는 2020년 8월 30일 한 인터뷰에서 '스가 장관은 사실 친한, 친중파이지만 아베의 입이라는 입장상 강경우익 스탠스를 취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https://v.kakao.com/v/20200830115923663|기사]]) 다만 해당 기사에서는 친한이라는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아베 정권의 문제점이나 한일관계악화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원인과 결과를 지적 많이 하였으나, 아베 정권시기의 인물들이 대부분 그대로 기용되고 직책만 조금 바뀐 스가 정권은 도리어 한일관계에서 달라질것 같다는 의견을 많이 피력했다. 반면에 아베 때와는 달리 스가 정권이 한일관계에 우호적일 것 같은 구체적인 사유에 대해서는 아직 답변하지 않았다. * [[김종필]]은 생전에 스가 요시히데에 대해 "한국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고 이해 속에서 양국간 우의를 다져야겠다는 마음씨가 보이지 않는다."라고 평한 적이 있다. 또 일본의 옛 정치인은 그래도 도량이 있었는데 스가 장관은 [[위안부]]를 무시하는 발언 등을 해서 문제가 많다고 비판하였다. * [[박근혜 정부]] 당시 [[이병기(1947)|이병기]] 전 국정원장이 주일대사로 부임할 때부터 인연을 맺었고, 그 즈음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한일 위안부 합의]]를 위해 긴밀히 협조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때문에 2017년 이병기 전 국정원장을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 혐의로 [[구속]]한 [[문재인 정부]]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421&aid=0004884034|#]] * 한국에서의 '[[친일]]'과 일본에서의 '친일'의 의미 차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2019년 2월 [[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의 '친일 청산' 언급에 대해 "[[3.1운동|3·1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독립운동]]사의 기억과 [[독립운동가]]의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맥락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이런 문맥에서의 친일은 전쟁([[태평양전쟁]]) 전이나 전쟁 중 일본 당국에 협력한 관계자를 반민족행위자로 비판하는 용어"라며 "[[일본어]]로 말할 때의 친일과는 의미가 다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일본에서 '친일'이라 하면, 한자 그대로 일본에 친근감을 느낀다는 의미 혹은 일본에 호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즉 '친일파 청산'이라는 언급은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매우 극단적인 표현으로 오해될 수 있는데, 스가 장관은 이러한 차이를 안다는 것.] 하고 덧붙였다. [[https://www.yna.co.kr/view/AKR20190227159300073|#]] *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에서 관방장관을 지낸 가지야마 세이로쿠를 정치적 스승으로 여겼다. 그래서인지 그의 아들인 [[가지야마 히로시]]와 친분이 두터우며 히로시를 [[스가 내각|본인의 내각]]에서 [[경제산업성|경제산업대신]]으로 임명했다. * 2000년 당시 그의 권유로 [[에다 겐지]]가 [[가나가와현 제8구]]에 출마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스가가 총리가 된 현재 에다 겐지는 [[입헌민주당(2020년)|입헌민주당]]에 합류하면서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 [[모리타 겐사쿠]] 치바현지사가 스가에 대해 "정책 통으로 행동력과 결단력이 있다.", "이럴 때일수록 주위에서 원한 남자"라고 말했다.[[https://news.yahoo.co.jp/articles/f9275f980cf3c7d1142637072821a11527b229eb|#]] * 2019년 4월 28일 [[니코니코 초회의]] 2019에 아베 수상을 대신해 처음으로 등단했다. 참석자들의 반응은 '진짜다!' 스가 장관은 "주목받아서 저도 놀랐습니다. 한번 오고 싶었습니다. 열기가 대단하네요." 하고 웃으며 코멘트했다. 레이와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언급했다. 기념 촬영에는 역시나 레이와의 레플리카가 등장했다. * 자서전 개정판을 출간하였는데, 여기서 벚꽃스캔들 때문에 공문서 중요성 글이 삭제되었다는 것이다.[[https://www.asahi.com/sp/articles/ASNBM5RD7NBJUTFK00Q.html|#]] * 2020년 11월 2일에 열린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전집중 호흡]]으로 답변드리겠습니다."라며, 인기 만화 [[귀멸의 칼날]]에서 나오는 전집중 호흡을 인용하는 모습을 보였다.[[https://youtu.be/ozXiUeNqfVQ|#]] [[후타바 채널]] 2차원뒤판 [[넷 우익]]의 반응은 알 수 없으나, 진보 비중이 높은 트위터 일본 네티즌들은 코로나 전 세계 확산 도중 뜬금없이 만화 용어를 장난스럽게 쓰는 태도를 곱게 보지 않고 있다. * 남동생 스가 히데스케는 자기 회사가 파산한 직후에 JR 동일본의 자회사 임원으로 입사했는데, 이례적으로 입사한 배경에는 총리와 회사의 밀월 관계가 있었다고 주간문춘이 밝혔다.[[https://bunshun.jp/articles/-/41424?page=1|#]] * 워낙 관료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인터뷰나 국회에서 질의응답을 하게 될 때 [[녹음기|정해준 답 외의 답을 하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기묘한 광경이 반복해서 벌어지기도 한다. 이렇다 보니 말은 아베가 스가보다 더 잘했었다는 평까지 나오기도 한다.[* 아베가 엄청 말을 잘했다고 하기보다는 아베는 타고난 정치적 입지를 갖추고 앞에 나서서 발언을 하는 경우가 많았던 만큼 자신이 어떠한 정치적 메시지를 던져야 할지 잘 알고 있는 반면, 관료 생활을 오래한 스가는 국회 질의나 기자회견을 통해 어떠한 정치적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지에 대한 노련미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내각관방장관 시절에도 불리한 질문에 답변하지 않는 한편 기자회견에서도 고압적인 태도로 임해서 언론계에서 상당히 반응이 좋지 않았다. [[https://news.yahoo.co.jp/articles/761c174ddc2dda1f182e9824b51805b55bac9253|#]] * 관방장관으로 재직하던 2019년 5월 미국을 방문해 매슈 포틴저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에게 8,874달러(약 958만원) 상당의 고급 위스키를 선물한 사실이 파악됐다.[[https://m.yna.co.kr/view/AKR20210806035400073?section=international/all|#]]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